[한국일보 칼럼] 말뿐인 삶 / 장수한 (17.01.03)

[삶과 문화] 말뿐인 삶

17.01.03


작년 한 해 한국을 바라보며 느낀 단 한 가지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말뿐인 삶’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한마디가 오늘날 병든 한국 사회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다들 말은 너무 잘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계 리더들과 책임자들은 온갖 미사여구로 화려한 말을 쏟아낸다. SNS와 포털, 뉴스에서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나는 모르오’ ‘나는 잘못이 없소’ 하고 말 하나는 잘한다.

말뿐인 삶은 곧 아무 행동이나 책임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 표면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함을 의미한다. 그 외의 보이지 않는 것, 내면의 것, 책임과 의무, 진실과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강준만 교수는 최근 저서 ’박근혜의 권력 중독’에서 이를 ‘의전사회’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나라의 리더가 꼭두각시로 전락한 이유는, 결국 ‘의전사회’가 만든 ‘의전 대통령’의 재앙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의전 공화국’이다. 우리나라에서 의전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다.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나라 전체가 의전 강박의 괴물이 돼버렸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의전 속에서 살아왔다. 학교와 군대는 물론 회사에서도 매일 의전을 수행해야 하는 삶이다. 의전 강박에 매몰된 학교에선 정문 앞 현수막에 이름이 새겨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생각하고, 군대에서는 사단장이 한 번 슬쩍 지나가는 의전을 위해 몇 날 며칠을 밤새 삽질만 한다. 회사에서는 사장이 오면 임원들이 일자로 도열하여 인사를 하며 매일같이 밥 먹듯 의전용 보고서를 작성하며 야근을 한다.

의전은 말 그대로 형식이다. 겉치레다. 본질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리더들이 보고서의 겉모습이나 형식처럼 혼나지 않을 정도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요소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렇게 1년 내내 상사의 의전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 나 역시 그 의전의 자리로 올라간다. 그러면 또 다시 내 아랫사람에게 의전을 강요하고, 그 의전이 다시금 나의 자리를 영광스럽게(?) 강화한다고 착각한다.

이렇게 의전 정치, 말뿐인 삶의 리더들이 요직을 점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결국 더 멋지고 화려하고 그럴싸한 말들과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창조경제혁신센터’라는 가장 그럴싸한 말들의 조합으로 마치 무언가 중요한 국가적 어젠다가 추진된다고 착각한다. 당명을 바꾸고 부서명을 바꾼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이름,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먼저 선점하고 공표하면 마치 진짜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변하는 것은 거의 없다. 이름만 바뀐 채 본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말뿐인 삶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뿐인 삶이 지속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누구도 제지하지도, 알아채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제지해야 할 자리, 알아채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 역시 말뿐인 삶을 사는 공범들이니 그들은 제지되거나 알아차려지지 않는다. 사회의 부조리, 권력의 부정부패, 정경유착 같은 것이 매일 오르내리지만 모두가 말뿐인 삶을 사는 곳에서는 역시 말로만 끝날 위험이 있다.

이제는 나라 전체가 말뿐인 삶을 청산해야 한다. 말뿐인 삶을 고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는 사소한 부조리를 눈감지 않고 내뱉어야 한다. 용기 있게 말하고 전파해야 한다. 언론이 진실을 파헤치는 말, 시민들이 촛불집회에서 하는 말, 또 우리가 일상에서 조금씩 행동하는 작은 말이 결국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리라 믿는다. 부디 새해에는 말뿐인 삶이 아닌 말을 통해 행동하는 삶이 되길 희망한다.

장수한 퇴사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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